루카 9장 51-62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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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1-62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57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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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주님의 부르심과 부름받은 사람들의 자세를 알려 줍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인 갈릴래아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의 사명을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접어드시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것을 알고는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탄식이 저절로 나올 만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런 문맥에서 주님을 따르는 문제를 꺼냅니다. 우리 마음이 내키고 환경이 좋을 때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주님께서는 결국 모든 이에게 거부당하고 버림받으신 분이며, 스스로 목숨을 바치시는 그 순간까지 홀로 그 길을 걸으신 분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고난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음을 뜻합니다.

어려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것도,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첫째,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하느님 나라 선포의 긴박함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제자들로서는 그런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 길을 함께할 것인지, 아니면 거부하고 포기할 것인지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둘째,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밭에 묻힌 보물이나 진주의 비유에서처럼 주님과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에서 어떤 것도 그보다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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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예수님 입장에서

    – 고향사람/사마리아인 입장에서

    – 제자 입장에서

2.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가가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하며 예수님과 동참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예수님과 동행하는 활동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활동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희생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주님의 부르심이 하느님 나라 선포의 긴박함으로 들리는지 묵상해 봅시다.  사회생활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며 양단간에 결정을 꼭 해야만 했었던 경험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보고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 나왔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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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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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선택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이른바 ‘결정 장애’를 겪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명확했던 과거 ‘규율 사회’에서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해도 되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 해야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이른 바 ‘긍정성의 과잉’이 ‘결정 장애’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이를 ‘피로 사회’가 겪는 병리학적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내 선택이 삶의 궁극적 가치와 맞닿을 때 인간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자유롭지만, 강요된 선택이거나, 허영과 공명심에 이끌린 선택의 경우, 일이 잘못되면 후회와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고,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에 대한 동경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따라나서고자 하는 다양한 이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수행하던 제자들은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합니다. 자신들의 신념만이 최고라고 믿는 배타적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명예와 안정이 보장되어 있는 길이 아닌,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고독한 여정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면서도 죽은 이들 속에 머물려는 이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에 혈연과 인맥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보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나선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하고 후회하는 자유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삶의 궁극적 목표인 하느님 나라를 향한 초월적 자유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자유가 무엇인지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 주일인 오늘은 예수님의 자유를 품고 사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면 좋겠습니다.(출저:https://maria.catholic.or.kr/)